암흑의 지하로. 후쿠오카의 탄광 “수라광”에서 가혹한 노동환경을 엿보다 ~ 연재: 한일의 Z세대가 함께 견학한 미이케 탄광 ~

2020년부터 COVID-19으로 인한 팬데믹 현상으로 인류는 일상 속 다양한 활동이 온라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The Leads Asia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기억이 증가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형상을 가진 것이 역사상 어떠한 기억으로 연결되는지를 재고하기위해서 2020년 11월부터 2021년 2월에 걸쳐서 워크숍 시리즈 “Conversation of Tangible Memories” (형태를 가진 기억의 대화)를 주최했다.

선조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개개인의 기억이 변화하는 도중에도, 여전히 당시의 기억을 전달하고 역사의 흔적을 남긴 것을 통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이를 계승해나갈 것인가.

이번에 주목할 것은 역사를 다음 세대에 계승하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2015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유형물 중 하나인 미이케탄광이다. THE LEADS ASIA의 멤버가 실제로 현지를 방문하여 생각한 것을 기록하여 전달하고자 한다.

・제1회 “When Urban Communication Meets Transnational Asia” 기사
(와세다 대학 문화구상학부 교수 / 한국학 연구소 소장 김경묵 교수)



・제2회 “21세기 역사의 계승과 도전” 기사
(뮌헨 나치 다큐멘터리 관장 미르잠 자도프 닥터 / NPO 홀로코스트 교육 자료 센터 도쿄와 콜라보레이션)

제3회 “아트를 둘러싼 한일관계의 조감도 ~국가주의(Nationalism)의 틀을 넘어 동아시아 예술을 통해 보는 세계~” 기사

보는 사람에 의해서 바뀌는 “문화유산”이 계승하는 기억이란?

과거의 역사에 의미가 부여될 때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

2015년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철제・청동, 조선, 석탄산업” (이하, 메이지 산업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등재와 관련하여 한국정부와 중국정부는 과거의 많은 사람들이 징용되어 노동을 강요되었던 역사를 비추어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와같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등재된 메이지 산업 유산은 우리들에게 남겨진 유형물을 통하여 어떻게 역사를 후세에 계승할 것인가를 묻는 계기가 되었다.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와 구마모토현 아라오시를 걸쳐 위치한 “미쓰이 미이케 탄광”은 메이지 산업 유산이자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논란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THE LEADS ASIA의 멤버는 미쓰이(三井)사가 관리한 “미이케 탄광”을 취재했다. 취재를 통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현지 시민이 각각 다르게 역사를 마주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본,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산업을 수인(囚人)가 지탱하는 구조를 갖다.

석유가 석탄으로 바뀌기 이전인 지금부터 약 60년전, 에너지 공급은 석탄에 의해 지탱되었다. 2018년도 일본의 에너지 자급률이 9.6%인 것에 비해 석탄이 주에너지원이었던 1960년도엔 국내 에너지 자급률이 58.1%로, 시미즈 타쿠 교수(와세다 대학)는 “태평양 탄광 노동조합, “5분간 뉴스”로 보는 전후 일본 석탄 산업의 폐지 과정” 칼럼 속에서 석탄산업은 전성기에 국내 노동자만 45만명이 되는 거대한 산업이었다고 언급했다.

석탄은 우리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당시의 생활에 없어선 안될 가공품을 제조하는 주원료였다. 이를 통해 일본에서 석탄이 당시 주요산업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석탄의 나무”/ 사사키 아야노・THE LEADS ASIA)

탄광의 일은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미이케 탄광에선 1963년 11월 9일 “전후 최악의 탄광사고”라고 불리우는 “미카와 탄진 탄좌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사망자 458명과 일산화탄소중독환자 839명에 이르렀다. (*미카와 탄진 탄좌 폭발사고와 위령비에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연재시리즈 다음회에서 언급할 예정입니다.)

“검은 다이아몬드”라고 불리우던 석탄은 “파면 팔 수록” 돈이 되는 산업이였다. 한편으론 위험이 가득한 노동환경으로 알려진 탄광에서 일을 했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이른바 “승자”가 다루는 역사에서 자세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위험한 노동환경 속 노동이 복역 중 형무(刑務)로써 일삼아진 시대가 있다.

“미이케 탄광 수인 노동 사진첩”에 의하면, 1873년부터 형사사건으로 징역을 받은 사형수와 무기징역수는 서(西)일본일대에서 미이케 탄광으로 이동하여 탄광에서 일하게되었다.

암흑의 지하로. 가혹한 노동환경의 중심 “수라광”을 방문하다.

현 미이케 공업고등학교의 외벽 중 벗겨진 시멘트 사이로 보이는 벽돌벽을 보면 이곳에 수인 노동자들이 1883년부터 살기 시작한 미이케 집치감(集治監, 일본 메이지 시대 형무소의 한 종류.)이 위치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집치감 외벽/ 박주미・THE LEADS ASIA)

미이케 집치감으로부터 약 5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미야노하라광(宮原坑)“은 “수라광”으로도 일컬어지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인 노동자가 석탄채굴에 종사했던 탄광이다.

탄광내 온도는 30℃도 이상이며 습도는 약 100%인 숨막히는 환경 속에서 수인 노동자들은 매일 12시간에 걸쳐서 탄광을 채굴했다. 나가와의 “생소한 우리 마을 1995년 한여름의 폐광“에 의하면, 한번 탄광내에 들어가면 식사를 할 수 없으며, 배식받는 음식도 쌀과 좁쌀을 섞어서 만든 주먹밥과 소량의 야채뿐이었다고 한다.

(사진: 미야노하라광의 철근 엘레베이터/ 박주미・THE LEADS ASIA)

지금도 미야노하라광을 방문하면 수인 노동자가 탄광내에 들어가기 위해 사용했던 철근으로 된 엘리베이터를 볼 수 있다. 문이 없는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두번 다시 지상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며 암흑의 세계로 향하던 수인 노동자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또한 어떤 이에겐  “최후의 햇빛”을 본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음식의 배식량을 줄이거나 고문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징벌은 매우 비인도적인 것이었다. 수인은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방에 갇혀서 생명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식량과 소금을 먹고 물을 마시며 침구도 없이 7일간 감금되는 생활을 일상적으로 보내왔다. 또한 “작위”라는 고문은 미이케 집치감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어 이후 일본 전국의 집치감에서 사용된 역사가 있다. 나가와의 “낯선 우리 마을 1995년 한여름의 폐광“에 따르면, 고문과 중노동에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인이 적지않았다고 한다.

“오무타 수인 묘지 보존의 모임”의 기록에 따르면, 현 미이케 공업고등학교엔 앞서 소개한 외벽뿐만 아니라 지하도가 존재한다고 한다. 이것은 채탄막장에 통하는 광도였다고 추측된다. (현재 이 지하도의 입구는 봉쇄되었다고 한다.)

1888년부터 1889년 (메이지 21년부터 22년)까지 일본 정부가 미쓰이 재벌에 불하한 뒤에도 미이케탄광은 수인이 노동력으로써 동인되었다.타카하시 신이치 “탄광 노동자의 이동과 구탄광지의 사회변동“에 의하면, 이 시기의 전탄광부 3,103명 중 수인은 2,144명으로 전체의 약 70%에 이르렀다고 한다. 수인 한명당 채굴한 석탄의 양은 치쿠호 광부의 약 2배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그 반도 미치지 못했다.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사망률은 매우 높고 마을의 이곳저곳에 무덤이 생겼다. 현재에도 오무타시 중심엔 많은 위령비와 묘비가 존재한다. 하지만 “오무타 수인 묘지 보존회”는 묘지의 관리가 어렵고, 보존 상태가 좋은 것은 그리 없다고 언급했다.

(사진: 미야노하라광 건물내부 / 박주미・THE LEADS ASIA)

(사진: 미야노하라광의 역사/ 박주미・THE LEADS ASIA)

전쟁과 사회불안으로 배제된 사람들이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동원되다.


쇼와 초기에 세계적인 대불황으로 일본에서도 1929년 쇼와 공황이 발생했다. 석탄 산업을 포함한 일본 국내 주요사업은 생산량이 40~50%로 절감했다. 일본 전국의 탄광은 폐광이나 노동자의 해고가 이따르며, 1931년엔 이 “수라광”이라고 불리우던 미야노하라광도 폐광되었다.

같은 시기에 미이케 형무소장과 미이케 광업소장은 예전부터 비판되고 있었던 수인, 여성, 미성년자의 광내 노동이 폐지되는 협정에 사인을 하여, 수인노동은 폐지되었다. 이는 일본의 강제적 수인 노동 전체에 종지부를 찍는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영혼(霊)이여, 잠드소서 – 미이케 탄광 수인 노동자 사진집-”의 연표에 기록되었다.

탄광의 중노동은 극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탄광의 주된 노동자가 수인이었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었던 직업이기도 했다. 그 이후 세계제2차대전을 겪으며, 국가의 주요 산업을 지탱하는 노동력이 필요하기때문에, 국책과 기업의 경영전략으로 미이케탄광을 포함한 전국의 탄광에선 조선 등 식민지의 노동력과 전쟁포로를 사용하게 되었다.

(제2회에 계속)

취재 및 작문: 사사키 아야노, 박주미, 타지마 모모코 / 구성: 코야마 카오리

by Ayano Sa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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